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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8 서울시향 <베아트리체 라나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애니스토리 2017. 10. 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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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베아트리체 라나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그리고 샤오치아 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을 붙인건 탁월한 프로그래밍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시대의 러시아 대표 작곡가 두명의 작풍을 한자리에서 느껴볼 수 있달까.. 

러시아 음악의 낭만과 후기낭만의 극명한 차이점은 정치적 배경에서 오는 것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쇼스타코비치 11번은 스탈린 사망 이후 작곡된 곡이라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색(?)까지 조금 엿볼 수 있는 곡이다. 


먼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개인적으로 절대 찾아듣지 않는 피아노 협주곡들이 세 개 있다. 슈만, 그리그, 그리고 차이콥스키. 들어도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사견 주의) 피아노를 전공했음에도 위의 곡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1악장 맨 앞부분을 듣는 방법 뿐. 중간부터 듣기 시작하면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는 세 곡. 특히 차이콥스키는 감성이 빵빵 넘치게 연주한다면 중박은 칠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해서 잘 찾아 듣지도, 치지도 않는 곡이다. 왠만하면 다들 잘 치니까. 하지만 라나는 내가 생각한 차이콥스키와 조금 다른 차이콥스키를 보여주었다. 깊고 풍부한 음악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절제미 또한 넘치는 차이콥스키랄까? 공연 전 들어본 라나의 음반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기 때문에 목욕탕같은 롯데콘서트홀에서 라나의 깔끔하고 똑똑한 연주력이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1악장은 아니나다를까 목욕탕같은 음향에 음들이 다 짜부가 되어서 뭉개졌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깔끔해지는 라나의 페달링과 섬세한 손가락들.. 음반에서 듣던 군더더기없는 연주가 비교적 잔향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깔끔한 처리는 오케와 피아노가 함께 팡팡 터지는 부분에서보다는 카덴차, 그리고  피아노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이끌어가는 2악장에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앵콜. 딱 거부감들지 않을만큼 잘 조립된 라나의 연주는 기대 이상으로 성숙했다. 앞으로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그리고 나의 최애 교향곡 중 하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공연 직전까지도 나는 샤오치아 뤼가 대만에서 온 지휘자, 그리고 세계 3대 메이저 지휘 콩쿨을 휩쓴 사람이라는 점 밖에 몰랐다. 이전에 한국에 두어차례 왔었으나 실황을 들어본 적이 없던 지휘자였고, 사진만 봐서는 동네에서 볼법한 아저씨의 모습이라 기대를 크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차이콥스키에서 시향을 컨트롤 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기대감은 롯데홀의 천장을 뚫어버렸다. 섬세하기도, 음악적이기도, 귀를 빵 뚫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높아진 기대감조차 우습다는 듯이 뤼는 엄청난 무대를 보여줬다. 내 기대감이 롯데홀의 천장을 뚫은게 아니고 뤼가 쇼스타코비치로 뚫어버린 것이다. 호흡이 긴 이 곡의 오프닝은 이 곡의 어떤 부분보다도 중요하다. 스탈린의 독재 이후 소비에트의 모습을 저음현으로만 표현하여 이 곡 전체의 분위기를 세팅하는 아주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는 무대에 있는 연주자들보다 더 긴장했다. 하지만 첫 음을 듣는 순간 바로 그 음산한, 또는 외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내 귀로 직행했다. 마치 소련으로 시간여행이라도 떠난듯이 흑백느낌 짙은 음악이 홀을 채우기 시작하는데 거의 감격했다. 모든 악기의 소리를 뭉개버리는 엄청난 홀에서 뤼는 백여개나 되는 악기들의 소리를 하나하나 들려주고 말겠다는 듯이 섬세하게 지휘해나갔다. 때론 음산하게, 때론 해학적으로, 때론 귀가 멀정도로, 뤼는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모든 메세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100점 만점에 200점. 

이 날 무대위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