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ies/Camino Francés

[산티아고 순례길] ⑥ 3/19 팜플로나에서 우테르가까지 17.2km

애니스토리 2025. 5. 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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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km도 채 안걷는다. 어제 안쉬고 걸어서인지 후유증이 꽤 느껴진다. 다들 걷는 푸엔테 라 레이나라는 곳까지 걸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다들 가는 길을 왠지 걷기 싫었다. 

 

 

진흙탕이었던 용서의 언덕을 지나고.

 

 

오늘은 유명한 '용서의 언덕'이라는 언덕을 오르는 날이다. 근데 어떻게 생긴 곳인지 몰라, 여기가 거긴가? 하며 열심히 진흙탕에 빠진다. 처음에는 조심조심 걸었지만, 신발이 두 사이즈나 큰 신발이다 보니 내 신발이 어느 지점쯤을 밟고 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결국 진흙에 푹 젖어버렸다. 조심히 걸었을 때에는 절대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진흙에 들어갔다 나오고 나니 '에라 모르겠다, 도착해서 씻어내지 뭐'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언제 또 진흙에 뒤덮여보겠어? 

 

그러다 철조물로 된 용서의 언덕 조형물이 나오고, 말들이 눈에 보인다. 멀리서만 보이던 풍력발전기들도 어느덧 내 눈 앞에 있다. 

 

서울, 뉴욕, 베를린까지의 키로수, 그리고 말.

 

서울과 뉴욕, 베를린까지의 거리가 나와있는 화살표와 말을 보니, 내가 내 인생에서 정말 멀리 떨어져 있구나 싶다. 그리고 말띠라 그런지 말이 괜시리 반갑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순례자들은 조형물 앞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 바쁘다. 그 틈에 섞여 덩달아 나도 찍었다. 혼자 걸으니 사진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감사한 마음이다.

 

이 장소를 지나고 나면 내리막이 쭉 나온다. 인사만 할 뿐 대화는 한 적 없었던 한국인들과 처음으로 함께 이야기를 하며 내려왔다. 그간 힘든 구간들을 혼자 걸어 고됨을 온전히 느꼈었는데, 오늘 사람들과 걸어보니 힘듬이 약간은 나눠지더라. 물론 오르막을 올라갈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순례객 신발로 만든 화분.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조금 더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슈퍼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작은 동네다. 미리 예약한 알베르게 앞에서 서성이자 친절한 주인이 나와 반갑게 맞이해준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분이었지만, 서로 번역기를 사용해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스페인어를 조금 배워올걸 싶다. 

 

스페인어와 영어가 불가능한 일본 아주머니의 체크인도 도와드리게 됐다. 일본어를 많이 잊었지만, 체크인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였다. 한국 연예인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너무나 까마득한 2000년대 무명 남자 아이돌그룹이었던지라 도대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끝까지 건강하게 걸으셨을까 모르겠다. 

 

이 알베르게 앞에는 고양이들도 많다.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내민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한 번씩은 다 인사해주고 만져줄 수밖에 없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너는 얼마나 행복하니?

 

 

우테르가의 사랑스러운 고양이 1.

 

 


 

 

고양이를 한참 쓰다듬다가 문득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신발과 옷을 빨아야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금 빨지 않으면 진흙이 굳어서 떼어내기 더 어렵겠구나 싶어 빨래터로 달려간다. 세탁기는 나에게 사치다. 자연스럽게 손으로 모든 것을 지워내고, 빨래줄에 빨래를 널고,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내 옷들을 바라보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이게 여유구나. 머릿속에는 잡생각이 아무 것도 없다. 빨래를 해야했기에 했고, 널어야했기에 널었다. 끝이다. 

 

 

내 빨래들

 

 


 

 

이날은 처음 순례자 메뉴를 먹어본 날이다. 음식점과 슈퍼가 전혀 없는 마을이기에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을 사먹어야만 했는데, 처음 먹어본 순례자 메뉴는 꽤 맛있었다. 복잡한 요리도 아니고 그저 샐러드, 고기, 감자, 계란, 빵, 밥이었지만, 유럽에 온 후 처음 먹는 쌀밥은 따듯했다. 물론 이후로 몇 번 더 먹고 질려서 끝까지 안먹긴 했다. 

 

 

올리브유 반, 밥 반.

 

 


 

 

밀라드와 밀라드의 가족이 걷다가 밥을 먹으러 들어왔다. 힌두교를 믿는 이들에게 비행기에서는 어떻게 기도하냐는 정말 바보같은 질문을 했는데, 신은 자연에 있고 내 안에 있는거라 말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에도 신이 있고, 들려오는 바람소리에도 신이 있기 때문에 자연을 마주할 때마다 기도한다고. 문장으로 간단히 적어서 그렇지, 이들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배움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식탁에 있는 모두의 건강한 완주를 위해 힌두교 찬송가도 불러주셨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핑 도는 시간이었다. 

 

까미노는 아름답다. 체력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시간들을 과할 정도로 매 순간 만난다.